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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창 너머 파리풍 지붕들에 부드러운 오후 빛이 내려앉고, 실내 왼편에는 피아노가 놓인 삽화

JOURNAL Nº 04가을의 낭만 · 012026 · SEOUL

CHARLES TRENET · WALTER EIGER · ALEXIS WEISSENBERG

〈En avril à Paris〉,가을의 낭만이 들린다

봄에 태어난 노래가 피아노 위에서 조금 늦은 계절이 되기까지

11분 읽기4분 듣기

초가을의 파리와 피아노를 상상한 AI 생성 삽화. 실제 장소나 연주 장면을 기록한 사진이 아닙니다.

제목은 4월인데, 자꾸 9월에 듣고 싶어집니다.

햇빛은 아직 따뜻하고,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만 조금 서늘한 오후. 김세현의 피아노를 듣고 있으면 그런 날에 오래 머물고 싶어집니다. 별일 없이 지나갈 뻔한 하루가 문득 아까워지는 기분입니다.

〈En avril à Paris〉. 파리의 봄을 노래한 샹송을 Alexis Weissenberg가 피아노곡으로 옮겼습니다. 그 곡을 김세현의 연주로 듣는 동안, 제목과는 다른 계절을 떠올립니다.

이 봄 노래는 왜
가을에 다정하게 들릴까

〈En avril à Paris〉는 Charles Trenet이 가사를 쓰고 Charles Trenet과 Walter Eiger가 함께 음악을 만든 1953년의 프랑스 샹송입니다. 햇빛과 부드러운 공기가 돌아온 4월의 파리, 센강과 뤽상부르 정원, 다시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들을 느린 왈츠에 담았습니다.

1950년대에 Alexis Weissenberg는 이 노래를 재즈풍의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했습니다. 김세현은 이 편곡을 파리에 바치는 첫 음반의 마지막에 놓았습니다.

제목과 가사는 분명 봄을 향합니다. 이 글의 가을은 김세현의 연주를 듣고 떠올린 계절입니다. 파리를 기억하며 고른 마지막 곡에, 듣는 사람의 초가을 오후가 겹쳐집니다.

‘4월’을 잠시 잊고

먼저 이 연주를 들어보세요.

작품
〈En avril à Paris〉
작사
Charles Trenet
작곡
Charles Trenet · Walter Eiger
편곡
Alexis Weissenberg
피아노
김세현(Saehyun Kim)
수록 음반
《Chopin Fauré》 · Warner Classics · 2026
들을 구간
전곡 · 약 4분

처음에는 제목을 보지 말고 흥얼거릴 수 있는 선율을 따라가 보세요. 그 곁에서 화음과 리듬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들어봅니다. 익숙한 선율이 다시 들릴 때에는 처음과 같은 장면이 떠오르는지, 조금 달라졌는지도 느껴보세요.

두 번째에는 음이 사라진 뒤를 들어보세요. 문장의 끝이 곧장 다음 문장으로 향하는지, 잠시 공기를 남기는지 확인합니다. 소리와 소리 사이의 시간이 이 곡을 화창한 봄날의 인사보다, 온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계절의 회상처럼 들리게 하는지도 함께 들어봅니다.

이 곡의 계절은 제목에만 있지 않습니다.
한 음을 놓고 다음 음을 기다리는 시간에도 있습니다.
Saehyun Kim · Warner Classics · 〈En avril à Paris〉. 영상이 열리지 않으면 공식 영상에서 듣기 ↗

01 · ORIGIN

파리의 봄에서 시작된 노래

“Quand Paris s’éveille au mois d’avril”파리가 4월에 깨어날 때 — Charles Trenet, 가사 일부. 한국어는 편집부 번역.

Charles Trenet의 가사는 한 사람의 은밀한 사랑 고백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도시가 먼저 눈을 뜹니다. 햇빛이 돌아오고 공기는 부드러워집니다. 생미셸의 센강은 오래된 근심을 잠시 잊고, 뤽상부르 정원에서는 새들이 사랑을 노래합니다. 벤치 위의 연인도 봄의 풍경 속으로 돌아옵니다.

입맞춤은 둘만의 사건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노래에는 파리 바깥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등장하고, 프랑스가 함께 노래하고 웃는 모습이 담깁니다. 이 곡의 봄은 도시와 사람들 사이로 번져가는 계절입니다.

가사만 따라가면 이 곡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겨울의 정적에서 봄의 움직임으로, 오래된 근심에서 새로 시작되는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이 노래를 처음부터 쓸쓸한 가을 노래였다고 바꿔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노래는 목소리를 떠난 뒤 다른 시간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함께 기억할 이름이 있습니다. 작곡 크레딧에 Trenet과 나란히 적힌 Walter Eiger입니다. 가사는 Trenet이 썼고, 음악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들었습니다. 익숙한 목소리 뒤에 있던 공동 작곡자의 이름까지 읽으면, 이 노래의 시작도 조금 더 온전해집니다.

가사 원문과 크레딧 확인 ↗

02 · ARRANGEMENT

다시 태어난 샹송

이 노래를 피아노곡으로 바꾼 사람은 한동안 이름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 Lumen에서 나온 《Mr. Nobody Plays Trenet》에는 Trenet의 노래 여섯 곡이 피아노 독주로 담겼습니다. ‘Mr. Nobody’라는 이름 뒤에 있던 피아니스트는 Alexis Weissenberg였습니다.

그의 손에서 〈En avril à Paris〉는 새로운 표정을 얻었습니다. 느린 왈츠의 선율에 재즈풍의 색채와 화려한 피아노 기교가 더해졌습니다. 가사가 들려주던 파리의 풍경을, 피아노로 들을 때에는 선율과 화음에서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훗날 이 음반을 들은 피아니스트 Marc-André Hamelin은 자신도 그 곡들을 연주하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악보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녹음을 들으며 여섯 곡을 직접 악보로 옮겼습니다. 한 달이 걸린 작업이었습니다. 그렇게 준비한 연주는 2007년에 녹음되어 이듬해 Hyperion 음반으로 나왔습니다. 한 사람이 남긴 연주를 다른 사람이 다시 연주하고 싶어 했다는 마음이, 이 편곡들을 이어주었습니다.

뒤늦게 Weissenberg가 직접 쓴 악보도 발견됐습니다. 유족이 찾아낸 것은 여섯 편곡 가운데 네 곡의 자필 자료였습니다. Muse Press가 2018년에 펴낸 악보집에는 이 자료들과 원반을 듣고 옮긴 악보가 함께 반영됐습니다.

목소리로 불리던 노래가 피아노곡이 되고, 음반 속 연주가 다른 피아니스트의 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전해진 〈En avril à Paris〉를 김세현은 자신의 첫 음반 맨 마지막에 놓았습니다.

03 · THE PERFORMER

피아니스트 김세현,
기대와 여운 사이

김세현은 첫 음반에 자신을 바꾼 도시를 담았습니다. 《Chopin Fauré》를 통해 돌아본 곳은 파리입니다. 그가 유럽에서 처음 연주한 도시이자, 스스로 삶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곳입니다.

〈En avril à Paris〉에도 그곳에서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김세현은 2025년 에펠탑 앞에서 열린 Concert de Paris에서 이 곡을 연주했습니다. 훗날 첫 음반을 준비하며,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어 이 곡을 골랐다고 설명했습니다.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의 가곡 〈Après un rêve〉를 직접 편곡해 첫 곡으로 놓고, Alexis Weissenberg가 편곡한 〈En avril à Paris〉를 마지막에 두었습니다. 두 노래 사이에 쇼팽과 포레의 피아노곡들이 이어집니다.

이 이야기를 알고 나면 마지막 곡이 조금 더 가까워집니다. 파리를 노래하는 오래된 샹송에, 그곳의 무대에 섰던 젊은 피아니스트의 기억이 겹쳐집니다. 곡을 고르고 순서를 정하는 일에서도 그가 음악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엿보게 됩니다.

독일 음악지 《Concerti》의 평론가 Christoph Vratz는 이 음반에서 김세현의 가볍고 또렷한 터치와 명료한 구성을 짚었습니다. 마지막 곡인 〈En avril à Paris〉에는 감상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는다는 짧은 호평을 덧붙였습니다.

제게 이 곡은 좋은 날을 조금 더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으로 남습니다. 햇빛이 따뜻했던 오후, 바람이 바뀐 것을 알아차리고도 한동안 창을 닫고 싶지 않은 기분. 김세현의 피아노에서 떠올린 초가을은 그런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여운 속에서 연주자가 궁금해집니다. 다음에는 어떤 곡을 고를지, 새로운 곳에서 만난 음악과 경험을 어떻게 자신의 연주에 담을지. 첫 음반에 파리의 기억을 담은 그의 선택은 앞으로 들려줄 이야기까지 기다리게 합니다.

한 곡을 다시 듣고 싶은 마음이,
한 피아니스트를 계속 듣고 싶은 기대로 이어집니다.

04 · LISTEN AGAIN

손끝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움

〈En avril à Paris〉에는 여러 음악의 결이 만납니다. 파리의 일상을 노래하던 샹송, 느린 왈츠의 세 박자, 그리고 Alexis Weissenberg가 더한 재즈풍의 피아노 편곡. 《Diapason》이 이 편곡에서 짚은 재즈의 감각과 화려한 기교는, 한 곡을 여러 방향으로 들어볼 실마리가 됩니다.

처음에는 멜로디에 마음을 맡겨도 좋습니다. 가수의 목소리로 불리던 노래가 피아노에서는 어떻게 이어지는지 따라가 봅니다. 한 번 더 들을 때는 그 곁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멜로디를 받치는 화음이 바뀔 때, 같은 노래의 표정도 달라지는지. 왈츠의 세 박자가 어디에서는 또렷하고, 어디에서는 선율 뒤로 물러나는지.

피아노의 색채는 이런 관계에서도 생겨납니다. 어떤 음을 조금 더 드러내고 어떤 소리를 가볍게 받쳐주는지, 음과 음을 얼마나 가깝게 잇고 어디에 숨 쉴 틈을 두는지. 악보에 함께 적힌 소리도 연주자가 무게와 거리를 조절하면 서로 다른 인상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곡을 다시 들을 때에는 ‘낭만적이다’라는 말 곁에 작은 발견 하나를 더 놓고 싶습니다. 마음에 남은 것이 흥얼거리게 되는 선율이었는지, 잠시 귀를 붙든 화음이었는지. 그 한순간을 찾다 보면, 처음에는 하나의 분위기로 다가왔던 음악을 조금 더 자세히 만나게 됩니다.

제게는 그 여러 표정 사이로 초가을의 온기가 남습니다. 다른 날 다시 들으면, 그날의 마음에 더 가까운 색을 발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FACT & LISTENING

원곡의 ‘봄’,
듣는 사람의 ‘가을’

〈En avril à Paris〉를 ‘가을 음악’이라고 분류할 근거는 없습니다. 가사는 4월의 햇빛과 봄의 사랑을 노래하고, 원곡은 1953년의 느린 왈츠 샹송입니다. Weissenberg가 계절을 가을로 바꾸려 했다는 기록도, 김세현이 이 연주를 가을의 정서로 설명한 인터뷰도 현재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 글의 가을은 듣는 사람의 경험입니다. 파리를 기억하며 고른 곡이라는 이야기를 알고, 김세현의 연주를 들으며 떠올린 초가을의 풍경입니다. 같은 곡에서 봄의 설렘을 듣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봄이 사실이고 가을이 틀린 답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는 노래가 그려놓은 계절이고, 다른 하나는 그 노래가 오랜 시간을 지나 도착한 귀에서 생겨난 계절입니다. 둘을 섞지 않을 때, 오히려 두 계절을 함께 들을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어느 계절이 들리나요

곡을 한 번 더 들을 때, 계절의 이름부터 고르지 않아도 좋습니다.

처음에는 선율만 따라가고, 다음에는 그 곁의 화음과 리듬을 들어보세요. 마지막에는 곡이 끝난 뒤 어떤 기분이 남는지 잠시 기다립니다.

그런 다음 한 문장만 적어보세요.

이 음악의 빛은 어느 시간에 머물러 있었나요?

4월이어도 좋고, 9월이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절을 맞히는 일이 아니라, 어떤 소리 때문에 그 계절이 떠올랐는지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Charles Trenet의 파리는 봄에 깨어났습니다.
Alexis Weissenberg의 피아노에서 그 도시는 말없이 기억되었고,
김세현의 손끝에서는 조금 늦은 빛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이 4월의 노래에서
가을의 낭만이 들립니다.

06 · SOURCES

이 글의 확인 방법

작품의 연도와 작사·작곡 크레딧은 서지·가사 자료를 대조했습니다. 가사는 한 줄을 발췌하고 나머지 내용은 요약했습니다.

Alexis Weissenberg의 익명 음반과 악보 출판 과정은 Muse Press의 출판 기록과 Marc-André Hamelin의 Hyperion 해설을 대조했습니다. 김세현의 음반 구성과 파리에 관한 발언은 Warner Classics 소개와 Mikiki 인터뷰, 평론은 Concerti의 해당 음반 리뷰를 확인했습니다.

‘초가을’은 이 글의 감상입니다. 악보의 마디별 분석이나 서로 다른 녹음의 정밀 비교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자료 탐색·문장 정리에 AI를 보조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자료 확인일: 2026년 9월 23일.

  1. 〈En avril à Paris〉 가사·크레딧 및 1953년 표기Paroles.net ↗
  2. Trenet so classic (4): En avril à ParisDiapason ↗
  3. Walter Eiger fondsMcGill University Archives ↗
  4. 6 arrangements of songs by Charles TrenetMuse Press · 2018 ↗
  5. Marc-André Hamelin recording notesHyperion Records ↗
  6. Saehyun Kim 《Chopin Fauré》Warner Classics ↗
  7. Saehyun Kim interviewMikiki / Tower Records ↗
  8. Saehyun Kim – Werke von Chopin und FauréConcert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