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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MISSION LETTER BEETHOVEN EXTRA · NO. 01

낭만의 지도 · 베토벤 외전 01

왕좌가 아니라
세 개의 의자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B♭장조 Op.97 《대공》

제국의 절정에서 태어나 몰락의 시간에 울린 음악. 그 중심에는 한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세 사람의 대화가 있습니다.

1814년 4월 11일, 빈의 호텔 ‘춤 뢰미셴 카이저’ 연주회장에 세 사람이 앉았습니다.

피아노 앞에는 베토벤, 바이올린에는 이그나츠 슈판치히, 첼로에는 요제프 링케가 있었습니다. 군인을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였습니다. 베토벤은 3년 전에 완성한 피아노 트리오 B♭장조 Op.97을 연주했습니다.

그날 객석의 이그나츠 모셸레스는 작품에서 전에 없던 새로움과 독창성을 들었습니다. 동시에 베토벤의 연주가 예전처럼 명료하고 정밀하지 않다는 것도 알아차렸습니다. 그와 별개로, 루이 슈포어가 훗날 남긴 한 리허설의 기억은 더 아픕니다. 청력을 잃어 가던 베토벤은 그 리허설에서 악기의 조율과 자신이 내는 소리의 크기를 온전히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작품은 그해 5월에도 다시 공개 연주됐습니다. 1814년 봄에 이어진 이 무대들은 베토벤이 피아니스트로 나선 것으로 알려진 마지막 공개 연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울린 음악은 이별의 독백처럼 쓰이지 않았습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는 서로를 부르고 기다리며 상대의 문장을 바꾸어 되돌려 줍니다.

대공에게 바친 음악은 왜 한 사람의 권위보다 세 사람의 대화로 들릴까요?

두 개의 시간

1811

작곡의 시간

패전과 통화위기 속의 빈. 나폴레옹의 권력은 절정에 가까웠고, 베토벤은 3월 26일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1814

공개 연주의 시간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유럽의 지도가 다시 그려지기 시작한 봄, 작품은 처음 대중 앞에서 울렸습니다.

1809년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했고 프랑스군은 빈을 점령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해 제국과 왕조의 권위를 한 몸에 모았습니다. 그 화려한 외관 아래에서 오스트리아의 재정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1811년의 재정 조치로 Banco-Zettel은 3월부터 기존 액면의 5분의 1로 평가절하됐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이 음악이 대중과 만난 1814년입니다. 러시아 원정과 라이프치히 전투를 거치며 나폴레옹의 제국은 무너졌고, 《대공》이 공개 연주된 4월에는 그가 퇴위했습니다. 그해 가을부터 빈에 모인 군주와 외교관들은 유럽의 국경과 왕좌의 위치를 다시 정했습니다.

제국의 절정에서 태어나 제국의 몰락 속에서 들린 음악.

그러나 《대공》은 국가파산이나 전쟁, 빈회의를 묘사한 작품이 아닙니다. 그런 사건을 악장에 대응시킬 근거는 없습니다. 이것은 곡의 줄거리가 아니라, 같은 악보를 둘러싼 두 시간의 풍경입니다.

서재에 서 있는 나폴레옹. 시계와 촛불, 문서가 주변에 배치되어 있다

자크루이 다비드, 《튈르리 궁 서재의 나폴레옹》, 1812. 한 인물과 시계·촛불·문서가 통치자의 자기규율과 권위라는 이미지를 조직합니다. 음악과 직접적인 영향관계가 아니라 동시대 권위의 시각문법을 보여 주는 평행선입니다. ·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Open Access

‘대공’은 베토벤이 붙인 제목이 아니었다

우리가 익숙하게 부르는 《대공》은 베토벤이 악보에 붙인 표제가 아닙니다. 헌정자가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이었기 때문에 후대에 굳어진 이름입니다.

루돌프는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막내아들이며, 베토벤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운 제자이자 중요한 후원자였습니다. 1809년에는 다른 두 귀족과 함께 연금을 약속해 베토벤이 빈에 머물도록 도왔습니다.

1811년 3월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대공의 손가락 통증과 궁정 행사로 수업이 쉬는 동안 부지런히 일했고 새 피아노 트리오도 그 결실 중 하나라고 전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문헌이 말해 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 곡이 루돌프의 인품을 그린 초상이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현재 알려진 자료에서 작곡가가 정해 놓은 줄거리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물의 이야기를 음악에 씌우는 대신, 악기 사이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 곡의 서사는 사건이 아니라 관계의 변화에 있습니다.

먼저, 음악으로

영상이 재생되지 않으면 유튜브에서 전곡 연주 열기

1악장 — 한 사람의 선율이 세 사람의 이야기가 될 때

초대

1악장 Allegro moderato. 피아노가 먼저 넓고 부드러운 첫 주제를 다정하게 들려줍니다.

피아노의 선율을 타고 바이올린과 첼로가 합류합니다.

현악기의 호흡으로 주제의 표정은 달라지고 변화하며, 세 악기가 반주와 선율을 오가는 형태를 보여줍니다. 이 작품에서 첼로는 저음을 보강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고 독립된 선율로 음악을 이끌며, 악기 간의 역할을 부드럽게 바꿔 줍니다.

피아노가 시작한 주제는 세 악기가 함께 기억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2악장 — 좋은 대화에는 그림자도 들어온다

동요

2악장 Scherzo: Allegro. 세 악기가 가볍게 솟아오르는 동기를 주고받습니다. 1악장의 넓은 호흡은 경쾌한 발걸음과 농담으로 바뀝니다.

중간부에 들어서면 바닥의 색이 달라집니다. 낮은 곳에서 반음계 선율이 기어오르고, 악기들은 그 낯선 모양을 서로 모방합니다. 밝은 춤 안으로 어두운 푸가토가 들어오며, 음악은 하나의 감정으로 정리되기를 거부합니다.

이 어둠을 전쟁이나 베토벤의 고통에 곧장 대응시킬 수는 없습니다. 음악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함께 웃던 세 목소리가 낯선 긴장을 통과하고도 다시 서로를 찾는 과정입니다.

세 악기는 서로 다른 표정을 오가면서도 대화를 멈추지 않습니다. 좋은 대화는 갈등이 없는 대화가 아니라, 낯선 목소리가 들어와도 관계가 무너지지 않는 대화에 더 가까울지 모릅니다.

3악장 — 같은 문장을 오래 변주한다는 것

공동의 내면

3악장 Andante cantabile, ma però con moto. D장조의 고요 속에서 피아노가 찬가 같은 주제를 먼저 들려줍니다.

‘노래하듯이’만큼 뒤의 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움직임을 지니고. 이 음악은 아름다운 소리를 세워 두고 바라보는 기념비가 아닙니다.

변주가 진행될수록 같은 화음과 선율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음표는 더 잘게 나뉘고, 성부의 밀도와 악기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어떤 순간에는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보다 뒤에서 작은 움직임을 보태는 악기가 음악의 표정을 더 크게 바꿉니다.

피아노가 시작한 주제는 세 악기의 서로 다른 기억이 됩니다. 같은 선율을 다시 들려주지만, 매번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광대한 바다와 하늘 앞에 아주 작게 서 있는 수도사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사》, 1808–1810. 거의 비어 있는 바다와 하늘은 인물을 지우는 대신 그가 바라보는 시간을 보이게 합니다. 3악장의 직접적인 영감이 아니라 선율 사이의 기다림을 보게 하는 시각적 평행선입니다. · Staatliche Museen zu Berlin, Alte Nationalgalerie / Andres Kilger, PDM 1.0

이번에는 선율을 좇지 말고, 선율을 받치고 있는 악기 하나를 골라 따라가 보세요. 배경이라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이야기를 바꾸는 순간이 들릴 겁니다.

4악장 — 침묵을 버리지 않고 세상으로 돌아오기

귀환

3악장은 완전히 문을 닫지 않습니다. 마지막 숨이 4악장으로 곧장 이어집니다.

그 깊은 변주 뒤에 나타나는 것은 장중한 승리의 행진이 아닙니다. 가볍고 조금은 익살스러운 론도 주제가 다시 몸을 움직입니다. 주제는 돌아올 때마다 악기를 바꾸고 표정을 바꾸며, 마지막에는 Presto의 빠른 6/8박으로 달려갑니다.

고요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움직임의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성찰의 목적은 세상을 떠나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농담하고 걷고, 다른 사람의 박자에 몸을 맞추기 위해 잠시 깊이 머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손과 숨 — 두 연주가 보여 주는 서로 다른 관계

기준 연주

멜니코프 · 파우스트 · 케라스

짧은 지속음과 투명한 질감. 누가 언제 문장을 건네는지가 선명하게 들립니다.

비교 연주

보자르 트리오 · 1979

현대 악기의 긴 지속음과 따뜻한 레가토. 세 사람이 만드는 큰 호흡이 먼저 들립니다.

멜니코프는 1828년경 빈에서 제작된 알로이스 그라프의 복원 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합니다. 작품보다 늦고 베토벤이 말년에 빌려 사용한 콘라트 그라프와는 다른 제작자의 악기입니다. 따라서 1811년의 ‘원음’을 복원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1820년대 빈 포르테피아노의 짧은 지속음과 투명한 질감은 세 악기의 관계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1악장에서는 피아노 화음이 공간을 가득 채운 뒤 오래 군림하지 않습니다. 현악기의 입구가 열리고, 첼로의 중간 성부가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3악장에서는 피아노의 음이 사라진 자리에 바이올린과 첼로의 호흡이 남고, 변주가 ‘한 사람이 꾸미는 선율’이 아니라 세 사람이 함께 바꾸는 시간으로 들립니다.

그다음에는 보자르 트리오의 1979년 녹음을 이어 들어보세요. 현대 그랜드피아노와 현악기의 긴 지속음, 따뜻한 레가토가 세 악기를 하나의 크고 긴 호흡으로 묶습니다. 멜니코프·파우스트·케라스가 누가 언제 문장을 건네는지 보여 준다면, 보자르 트리오는 세 사람이 얼마나 길게 한 호흡을 만들 수 있는지 들려줍니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연주가 바뀌면 작품 속 관계의 거리도 달라집니다.

60초 청취 지도

01초대피아노의 주제를 현악기가 받아 가는 순간
02동요낮은 반음계 선율이 밝은 춤을 흐리는 순간
03공동의 내면같은 주제가 다른 악기의 기억으로 변하는 과정
04귀환쉼 없이 시작되는 4악장, 고요가 움직임으로 번역되는 순간

지금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악기보다 다음 문장을 가능하게 하는 악기를 찾아보세요.

오늘의 질문

《대공》은 귀족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오래 기억되는 것은 한 사람의 위엄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세 사람이 한 문장을 함께 소유하는 방식입니다.

동등함은 모두가 같은 크기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먼저 말할 수 있고, 누군가는 오래 침묵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주도권이 한 사람에게 영원히 머물지 않고, 다음 사람의 목소리가 앞선 문장의 뜻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말을 시작했나요?
그리고 누가 그 문장의 뜻을 바꾸었나요?


이번 호의 음반

기준 연주
Alexander Melnikov · Isabelle Faust · Jean-Guihen Queyras
Beethoven: Piano Trios Nos. 6 & 7 “Archduke”
Harmonia Mundi HMC 902125

비교 연주
Beaux Arts Trio
Beethoven: Piano Trios
Philips, 1979

참고 자료

  1. Beethoven-Haus Bonn — Piano Trio Op.97 작품 정보
  2. Seow-Chin Ong — The Autograph of Beethoven’s “Archduke” Trio, Op.97
  3. Beethoven-Haus — Beethoven’s Capital
  4. 진유경 —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B♭장조 Op.97 연구분석
  5. 월간 객석 — 멜니코프·파우스트·케라스의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6. National Gallery of Art — Jacques-Louis David
  7. Staatliche Museen zu Berlin — Caspar David Friedrich